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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구 - 김이환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현대인
이준호 | 승인 2013.03.06 |(0호)

시인 김혜순은 「죽은 줄도 모르고」에서 현대인의 삶을 이렇게 비판한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황급히 일어난다/텅 빈 가슴 위에/점잖게 넥타이를 매고/메마른 머리칼에/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우유를 쏟아붓고/죽은 발가죽 위에/소가죽 구두를 씌우고/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바람처럼 내달린다”

현대인은 자신을 되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 스프링벅이나 누 떼처럼 앞만 보고 달린다. 그 끝엔 허탈과 좌절, 심지어는 파멸과 파탄이 있을 뿐이지만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현대인의 불안감과 중압감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돌연변이나 외계 생물체의 공격, 뱀파이어나 좀비들의 출현,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의 창궐까지. 이른바 ‘억압된 것의 회귀(귀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프로이드가 고안한 개념인데, ‘억압된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반드시 무의식을 뚫고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현대인의 억압되고 불안한 심리를 느닷없이 나타난 ‘구(球)’를 통해 표현한다. “높이가 2미터가량 되고 표면이 금속처럼 매끄럽고 완전히 검은색”인 ‘구’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정체불명의 ‘구’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흡수한다. 하늘을 날기도 하고, 물 위로도 이동한다. 둘로 분열하기도 한다. 자주포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구의 속성은 현대인의 욕망과 닮아있다. 작가는 구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다 막판에는 그 욕망에 먹혀버리는 현대인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구’에 대해 묘사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하지만 끝내 구의 성분이나 정체에 대해 밝히지 않는다. 아니, 밝힐 수 없다. 현대인들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쫓기는 도중에 소식을 들으려고 가끔씩 텔레비전을 켠다. 그럴 때마다 화면엔 “절대로 한 장소에 머물지 말고 지속적으로 이동할 것”을 권하는 자막이 떠있을 뿐이다. 이 또한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며 좌표를 잃은 현대인들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서른두 살의 평범한 영업사원인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극심한 혼란에 빠진 주인공의 심리와 사회를 스케치하듯 보여준다. 주인공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 ‘남자’라는 익명으로 처리된다. 이 ‘남자’는 이 글을 쓰는 ‘나’이기도, 이 글을 읽는 ‘당신’이기도 하다. 혹은 사회구성원 전체이기도 하다. 남자는 소외되고 고립되고 나약하고 단절되고 파편화되고 왜곡된 삶을 사는 현대인의 표상이다. 작가는 쫓기는 남자를 통해 우리들에게 왜곡된 소비자본주의, 세속화된 종교, 훼손된 공동체의식, 극단적인 이기주의, 집단히스테리를 차례로 경험하게 한다.

언뜻 보면, ‘공동체에 닥친 불행에서 비켜난 이질적 존재’라는 점에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나,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로 더 알려진 리처드 매더슨의 「나는 전설이다」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말은 사뭇 다르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소설은 끝났을지 몰라도 현실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을 조심하게 젊은이.”로 시작한 소설은 “남자는 도망친다.”로 끝나는 열린 결말을 제시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당부와 경고의 의미가 담긴 노인의 말엔 목적어가 말줄임표로 생략돼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남자는 지금도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는 ‘나’이기도, ‘당신’이기도 하다. 혹은 ‘우리’이기도 하다.

이준호  소설가,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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