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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놀이
구희태(동국대·3학년) | 승인 2016.12.13 |(0호)

 늦잠을 잔 덕에 지나치듯 급하게 걸었던 장충단 공원이 퍽 아쉬웠다. 어젯밤 우산이 없어 줄기에 매달린 낙엽의 마음으로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 한바탕 비가 쏟아진 뒤 한층 선명해진 단풍들로 더더욱 풍성해질 가을 풍경을 간절히 기대해보았다. 제발, 한 번만 더 견디며 떨어지지 말고 그대로 매달려있어 주렴. 힘들 때 한 번 더 버티는 건 정말 소중한 거란다.

 그 덕에 오늘은 어제보다 여유로운 아침이 찾아와주었다. 물론 아까운 아침 식사와 맞바꿨지만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하늘과 수줍게 조각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 발걸음에 맞춰 들어오는 지하철에 새어나오는 흐뭇한 웃음으로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어제 본 단풍이 홀연히 사라져버리진 않았을까하는 일말의 불안함으로 거칠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늘 보던 파출소를 지나 마침내 멈춰선 곳엔, 고맙게도 한 차례의 혹독한 시련을 훌륭히 버틴 기특한 단풍잎들이 나와 똑같은 햇볕을 쬐며 그 자리에 그대로 곱게 머물러 있어주었다.

 넓지 않은 공원을 한 바퀴 돌아다니면서 곳곳에 묻어 있는 가을을 만끽했다. 멀리서 전체를 굽어보기도 하고, 가까이서 나뭇잎 무늬를 눈으로 그려보면서 맑고 평화로운 가을 오후를 마음에 담고선, 떨어진 낙엽 사이로 내 발걸음도 하나하나 떨어뜨리며 다시 되돌아갔다. 어제 봐놓은 기가 막힌 장소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빛을 담고 있는 놀이터 / 제공: 구희태

 굳게 문이 잠긴 낡은 경로당 옆을 두꺼운 은행나무가 꾸미고 있는 곳, 군데군데 놓인 벤치와 탁 트인 길목, 그 맞은편에 작고 좁은 놀이터 한 칸. 누군가 통째로 가을 한복판을 가둬놓은 듯 알록달록한 놀이터가 풍기는 깊고 묘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삐걱거리는 그네와 잘게 갈린 모래, 그 주위를 둘러싼 낙엽은 마치 어른들에게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곁에 앉아서 숨을 고르고 정면에 보이는 놀이터를 몇 분간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면, 어느새 어른이 되어 기억의 흔적조차 없이 나만 알고 있는 비밀스런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몇 개나 떠올라서 찬바람에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건조하고 푸석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또 다른 조그만 세상. 내가 본 놀이터는 그랬다.

▲놀이터에서의 단풍놀이 / 제공: 구희태

 평소에 늘 지나가던 길에 이렇게나 어여쁜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에 매번 지나치듯 걸었던 걸음이 새삼 아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바쁜 일상의 틈을 비집고 그 사이에 여유를 끼워 넣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해야 할 일에 뒤덮이고, 꽉 찬 일정표 사이에서도 기어코 사소한 행복 하나 쯤을 찾아내고야마는 사람, 혼란스러운 와중에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고, 정신없는 도중에도 의미 있는 문장 한 줄을 새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보았다. 우리가 걷는 일상적인 발자국에도, 언제나 남몰래 의미는 숨겨져 있다.

 그렇게 당장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수업 시간을 그럭저럭 보내고 남산엘 갔다. 하루에 한 번은 들르게 되는 중앙도서관과 가끔 먹는 학생식당에서 몇 걸음 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산책로를 이런저런 핑계로 찾지 않은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 감회가 새롭기도 하면서 그 곳에 머물러있을 더 넓고 보다 여유롭게 알록달록한 가을이 기대되기도 했다.

▲남산 산책로 / 제공: 구희태

 쭉 뻗은 산책로 양 옆을 풍성하게 메우는 가을 단풍과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 귓가 너머로 자연스레 울리는 시냇물 소리와 천천히 발걸음에 맞춰 유유자적하게 흘러가는 구름. 손을 뻗어도 닿질 않는 저 높게 펼쳐진 하늘, 저 달의 뒤편에서 누군가 이렇게 걷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면 무어라고 할지.

 종종 부는 춥고 쓸쓸한 바람이 조만간 가을이 가고, 곧 겨울이 찾아오리라는 걸 드문드문 일깨워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겨울의 혹독하고 냉랭한 바람과 차갑고 무거운 눈꽃을 예감하는 여린 나무들과 떨어짐을 알고 있을 무수한 낙엽들의 마음을 짐작하면서 걸었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멀리서 들려오는 숲이 흔들리는 은은한 소리가 그들의 가늘고 긴 떨림처럼, 한숨과 함께 내뱉는 한 마디의 중얼거림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같은 길을 다른 심정으로 되돌아갔다.

 뭔가에 떠밀리듯 바쁘게 살고 있었던 요즘이라, 더욱 소중한 한조각의 하루다. 야간 수업을 마치고 어둑해진 길과 드물게 켜진 가로등, 깊은 밤에 주머니에 빠진 세상 속에서 한층 짙어진 그림자를 좇아 걸으면서 오늘의 인상 깊은 단풍놀이를 되뇌어보았다.

 이 얼마나 풍요로운 기쁨인가. 낮과 밤을 모두 보내고 나서 모두가 잠에 빠진 새벽에, 조용하게 되돌아 볼 즐거운 기억이 있다는 것이, 하나하나 되새기며 적절한 단어와 어울릴 만한 표현을 찾으며 진심을 눌러 담아 마침내 추억으로 꾸며낸다는 것이, 베개 머리맡에 포근한 추억에 꼭 알맞을 배경음악 하나 틀어놓고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억나지는 않을 분명히 행복할 꿈에 흠뻑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마침내 내가 비로소 그럴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벅찬 행복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가 싶어 오늘 밤은 차마 잠에 들고 싶지가 않다.

 

구희태(동국대·3학년)  tmdgus1654@hwangry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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