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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7회 황룡학술문학상 문학부문 가작(문학평론)세월호의 사건성과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이 가야 할 길 -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와 ‘아이를 찾습니다’ 중심으로
관리자 | 승인 2019.01.07 |(0호)

세월호의 사건성과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이 가야 할 길

- 김영하의「옥수수와 나」와 「아이를 찾습니다」를 중심으로

1. 세월호의 사건성과 한국문학의 변화

2. 냉소적 주체들의 파괴된 인간관계 비판, 혹은 세월호 이전 김영하 소설이 많이 말한 것 - 「옥수수와 나」를 중심으로

3. ‘참된 삶’의 추구 혹은 세월호 이후 김영하 소설이 드디어 말하기 시작한 것 - 「아이를 찾습니다」를 중심으로

4. 세월호 이후의 김영하를 기다리며 혹은 기대하며

 

1. 세월호의 사건성과 한국문학의 변화

 

2014년 4월 진도에서 발생했던 충격적인 일은 많은 수의 기록물을 만들어냈다. 바다 속에 가라앉은 배를 종이 위에라도 띄우겠다는 것처럼 경쟁적으로 그 일에 대해 글을 썼다. 그 많은 글들은 결국 ‘세월호 문학’이라는 커다란 지류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세월호 문학’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혹자의 말처럼 한국 사회는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로 나뉘었다. 세월호를 마주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문학도 세월호 이전의 문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세월호 문학’이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문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논문을 써냈다. 그런데 그 논문들은 ‘세월호 문학’의 전체적인 경향이나 형식, 조금 더 나아가 몇몇의 작품들을 분석하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각각의 작가들에게 세월호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서술된 논문이 많지 않다. 그래서 한 작가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 작가의 문학에 세월호 사건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월호 이후의 나온 작품은 그 전의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에 초점을 맞추고 서술하려고 한다.

‘세월호 문학’에 참여한 여러 작가 중 왜 김영하 문학에 주목해야 하는가. 김영하는 등단한 이후 예리한 눈빛으로 시대의 문제의식을 명쾌하게 또는 아이러니하게 담아내왔다. 이번 세월호 문학 역시도 김영하는 특유의 표현과 색다른 장면의 삽입으로 다른 세월호 문학과는 다른 독특한 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김영하는 개인적으로도 2014년이 그의 작품 세계에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기도 하다. 과연 세월호 사건이 김영하의 문학 전반에 어떤 충격을 가져왔고 따라서 그의 소설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2014년에 발표한 「아이를 찾습니다」와 그 이전에 발표한 「옥수수와 나」 두 단편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냉소적 주체들의 파괴된 인간관계 비판, 혹은 세월호 이전 김영하 소설이 너무 많이 말한 것 -「옥수수와 나」를 중심으로

 

이 작품은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나’라는 화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님에도 닭들에게 쫓기는 옥수수라고 믿는 병을 가지고 있다. ‘나’는 소설가이지만 글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어 출판사에 다니는 이혼한 전 아내로부터 차기작 원고 독촉을 받는다. 또 월 스트리트 출신의 출판사 사장은 집필 작업을 하라며 ‘나’에게 미국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기도 한다. ‘나’는 출판사 사장의 집에서 그의 아내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미친 듯이 글을 써간다. 그러나 출판사 사장에게 그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한 사실을 들키게 되고 그에 분노한 사장은 ‘나’와 그의 아내에게 약을 건네며 먹으라고 협박한다. 그것을 삼킨 ‘나’는 자신이 옥수수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옥수수와 나」는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는 김영하 특유의 시선이 잘 담겨있는 작품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지니는 특성과 묘사를 통해서 물질만능주의의 사회 안에서 가치를 상실한 채로 욕망만이 가득한 인물들의 모습, 도구화 된 인간과 그에 따라 파괴된 인간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소설의 시작과 끝에 지젝의 유명한 농담을 삽입해 옥수수와 닭의 이미지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점이나 대사가 많이 사용된 점이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작품은 한 소설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 주인공 ‘나’는 창작의 욕구를 잃어버린 소설가이다. 그는 소설가이지만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출판사에도 큰 빚을 지고 있으며, 이혼한 아내와 딸에게 생활비와 양육비를 지급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밖에 없는 딸의 대학등록금 조차도 내주기 힘든 형편이다.

 

“글이 안 써져. 안 써지는 걸 어떡해? 글을 써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줄 거 아냐?” (p.115)

 

“원고 안 넘기면 두건 씌워서 관타나모로 데려갈 건가?”

“일단 최후통첩을 하고 반응이 없으면 소송하겠대.”

“뭐? 소송? 그래서 당신을 보낸 거야? 최후통첩하라고? 우리가 한 때 한 이불 덮고 자던 사이라는 걸 혹시 모르고 있나?”

“알아. 미국에서는 그딴 거 신경 안 쓰나봐. 아니면 이게 더 잘 먹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든지.”

…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계약금 토해낼 거야? 아니면 새로 데드라인을 협상해볼래?”

“둘 다 못하겠다면?”

“우리 회사 변호사가 전화할 거야.” (p.116)

 

“쫑이 말로는, 일부러 등록금 싼 데만 골라서 보냈대.”

“그럼 스탠퍼드나 뭐 그런 비싼 사립도 갈 수 있었다는 거야?”

“아빠가 좀 믿음직한 사람이었으면 그런 데도 지원했을 거야.”

“왜 모든 게 내 탓으로 귀결되는 거야?”

“모든 건 당신에게 달렸어.”

수지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작가가 무슨 돈이 있어? 당신도 알다시피 받은 계약금도 다 써버렸잖아? 내 사정 뻔히 알면서. 빚더미에 앉아 있다고.” (p.117-p.118)

 

‘나’와 전 아내의 대화를 통해서 어려운 ‘나’의 상황을 아주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글이 안 써져. 안 써지는 걸 어떡해?”(p.115)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글을 못 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인정하지만 창작에 대한 욕구를 아예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본인은 지금 글이 안 써지는 것뿐이며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원고 독촉을 하러 온 편집자이자 전 아내에게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를 한다.

 

“혹시 지금 뭐 쓰고 있는 거 없어? 응?”

이렇게 물을 때는 영락없이 필자 관리하러 온 편집자다.

“글쎄 하나 있긴 한데, 아직은 비밀이야.”

“비밀이라는 것 보니까 뭔가 괜찮은 거 쓰고 있나봐?”

“뭐 다 써봐야 알지. 열심히 쓰고 있기는 해.”

모든 작가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

“뭔데 그래?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

모든 편집자는 이렇게 작가의 말을 믿는 척한다. 나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일제시대의 유랑 곡마단 얘긴데. 이걸 라틴아메리카풍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푸는 거야.” (p.120)

 

‘나’가 밝힌 대로 ‘유랑 곡마단 얘기’는 거짓말이다. 지금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럴싸한 말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도 그 앞에 앉아있는 편집자도 거짓말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속이 훤히 보이는 말로 자신의 결핍을 감추는 연기를 하는 것이다. 또 “난 도망 다닌 적도 없고 제대로 안 쓴 적도 없어. 매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p.119) 자기합리화 가득한 대사를 날리면서 자기 자신을 위안하기에 급급하다. ‘나’는 결핍에 관심이 없다.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노력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결핍을 그럴싸하게 감출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만을 치열하게 할 뿐이다. 그 고민의 결과는 인정이 아닌 연기와 자기위안인 것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은 욕망으로 가득 찬 인물들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 그 중에서도 출판사 사장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사장은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다. 이 적극적인 행동은 출판사 사장의 욕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본가의 욕망이 겉으로 강하게 표출되기 때문에 ‘나’와의 대립이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출판사 사장은 계약금은 받아가고 원고는 내놓지 않는 주인공 ‘나’를 재촉하는 인물이다. 출판사 사장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권만 존재한다. ‘나’에게 원고를 받아오는 것과 계약금을 회수하는 것. 출판사 사장은 원고를 받아내기로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전 아내를 담당 편집자로 보내는 것이다. 전 아내는 ‘나’를 공적인 일로 만나러 왔지만 사적인 영역을 이용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특수한 위치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출판사 사장은 이 점을 교묘하게 사용해 ‘나’를 파고든다. ‘나’ 역시도 이 상황에 대해 “거기는 편집자가 너밖에 없니? 도대체 전남편에게 원고를 받아오라고 시키는 사장이 어딨냐?”(p.119)며 불편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다. 출판사 사장이 원하는 대로 전 아내의 말에 휘둘릴 뿐이다. 그리고 출판사 사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가 집필한 작품들의 초판본을 잔뜩 들고 직접 찾아간다. 그리고 아주 그럴싸한 얼굴과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한다.

 

“사실 제가 박선생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행여나.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애매한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사장은 들고 온 쇼핑백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다 뭡니까?”

“뭐긴요. 다 박선생님 책이죠. 사인 받으려고 다 가지고 왔습니다.” (p.127)

 

‘나’에게 초판본을 보여주고, 자신이 ‘나’의 열렬한 팬임을 밝히고, 거짓말로 지어낸 차기작에 대해서 “엉덩이를 들썩이며”(p.129) 근사하다고 반응을 해준다. 그런 출판사 사장의 모습에 ‘나’는 경계심을 거둘 수밖에 없다. 그 무방비 상태에 놓인 ‘나’는 “좋은 소설을 하나만 써주십시오.”(p.132)라는 사장의 말에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지요.”(p.132)라고 대답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출판사 사장은 그렇게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에게서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얻어내자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집까지 빌려주겠다는 선의를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이 선의는 오래가지 못한다. ‘나’가 출판사 사장의 집에서 그의 아내와 육체적 관계를 했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자 출판사 사장은 자신이 보였던 선의는 순식간에 감추고 본모습을 드러낸다. 총을 들고 ‘나’를 협박하면서 어떻게 하면 돈을 회수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치열하게 고민한다.

 

“좋아. 책은 내겠어. 작가 박만수의 마지막 작품. 미완성 유고 소설이라고 선전하면 계약금은 회수할 수 있겠지. 뭐, 운이 좋다면 꽤 많이 팔릴 수도 있겠어. 아, 뉴욕에서 총 맞아 죽기 전까지 쓰던 소설이라고 언론에서 떠들면 좀더 나가려나? 이미 원고지 천 매가 넘는 것 같던데. 그럼 책 한 권 분량은 될 거고, 오히려 어설픈 후반부가 없으니 독자들은 마음대로 상상하겠지. 아 완결됐다면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면서 아쉬워도 하겠고. 아무리 봐도 이게 최선이야. 박작가는 이쯤에서 죽어주는 게 그간 써온 작품들의 운명을 위해서도 좋을 거야.” (p.162)

 

총을 들고 내뱉는 이 살벌한 대사는 출판사 사장의 본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박선생님에서 박작가로 호칭이 변화하는 점이나 돈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서 그가 굉장히 목적 지향적이며 돈이 최우선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나’의 전 아내 역시도 돈을 얻어내기 위해 ‘나’를 독촉한다. “이 뻔뻔하고 한심한 인간!”(p.115)라고 별안간 화를 내기도 하고 “사장이 날 잡아먹으려고 그래.”(p.115)라며 동정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거기에 출판사에서 소송을 걸 것이라며 겁을 주는 방법도 사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는 딸이라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이 딸이라는 존재가 전 아내가 ‘나’를 상대로 이용할 수 있는 사적인 영역이다. 딸을 이 대화에 등장시켜 “모든 건 당신에게 달렸다.”(p.118)면서 딸에 대한 ‘나’의 죄책감을 유발시킨다. 딸이 원하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그 돈을 내주지 못하는 주인공의 무능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나’를 계속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 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글을 못 쓰겠다고 말을 꺼낼 수 없게 된다.

출판사 사장과 ‘나’의 전 아내는 ‘나’에게 받아내야 할 것이 있다. 즉 두 사람의 목적과 대상이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행동한다. 결과론적으로 나의 목적과 상대의 목적이 같기 때문에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상대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그 두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전 아내와 출판사 사장이 원하는 목적을 이뤄주는 방향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계획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글을 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나’의 친구로 등장하는 철학과 카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 각각의 일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고 섹스파트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와 섹스 파트너를 두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행위는 철학과 카페가 자신의 욕망을 처리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 수단 특히 후자의 경우는 본능적이고 노골적이다. 친구의 아내를 섹스 파트너로 두고, 아내가 있어도 섹스 파트너를 두는 둥 사회적으로 지탄받을만한 욕망처리 방법이다. 그래서 두 인물은 그럴싸한 말을 덧붙여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섹스 파트너와 뭔가를 교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나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 나와 그녀는 뭔가를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낭비하기 위해 만나는 거야.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함께 소비하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낭비하는 것은 바로 섹스라는 관념이야.” (p.123)

 

이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 욕망에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인다. 그 욕망을 위해서 선뜻 행동을 한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자신을 꾸며내고 연기하는데 아주 능숙하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들이 그럴듯해 보이는 말들로 자신의 행동을 꾸며내고 정당화한다. 그래서 주인공 ‘나’ 곁의 주변 인물들은 주인공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존재들은 아니다. 주변의 인물들은 ‘나’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잘 속일까를 생각하며 연기 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가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변명과 위안으로 연기를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옥수수와 나」에 등장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을 꾸며내거나 연기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의 시점이다. 시점이란 화자가 사건을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 하는 시각의 문제다. 「옥수수와 나」는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1인칭 시점은 작중인물의 심리와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좋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인칭 시점의 「옥수수와 나」 역시도 화자로 나서는 ‘나’의 생각과 심리상태, 더 나아가 그가 가진 욕망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차피 출간도 못할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소설이니 이전에 쓴 부분을 살필 필요도 없었고 인물의 일관성 같은 것도 중요치 않았다. 말이 되든 안 되든 그저 써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p.150)

 

그리고 화자인 ‘나’는 본인의 시점으로 주변인물의 모습이나 행동, 말을 서술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함께 나열한다. 미국의 대학교로 원서를 넣은 자신의 딸에 대해 “쫑이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독하고 지는 걸 절대 못 참았다. 호승심이 강한 어린애처럼 매력 없는 존재도 드물다. 초등학교 때부터 밤을 새워 공부하고 별것도 아닌 보드게임 한 판 지고도 대성통곡을 하는 애라니. 내 인생에 행운이 있다면 우리가 갈라설 때 쫑이가 제 어미를 선택하고 일찍 내 곁을 떠나갔다는 것이다.”(p.118) 라고 말하거나 친구 철학과의 대화 끝에 “누가 철학자 아니랄까봐 냉소적이기는.”(p.124), “사장은 허리가 잘록 들어간 군청색 재킷에 흰색 바지를 입고 적갈색 로퍼를 신고 있었다. 부모 잘 만난 강남의 철부지 같은 행색이었다.”(p.126), “눈은 큰데 코와 입이 작았고 눈 아래로 다크서클이 심해서 너구리를 연상시켰다.”(p.126), “평범한 남성을 일순 부끄럽게 만드는 대단한 미모였다.”(p.144),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있으니 그 미모가 더 빛났다. 전직 모델이 아닐까 싶은, 도저히 일반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미색이었다. 도대체 사장은 이런 아내를 두고 왜 수지 같은 촌닭과 사귀는 것일까.”(p.145) 같은 표현들을 중간 중간 삽입한다. 그렇게 하면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서술과 평가를 동시에 하게 되는데, 이는 독자들이 인물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지표가 된다. 이미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는 독자들의 판단에 다시 한 번 ‘나’의 생각이 침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화자 ‘나’의 관점과 아주 흡사하게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평가하면서 화자 ‘나’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화자 ‘나’와 동일시하면서 주변 인물을 평가하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완전히 화자를 믿지 않는다. ‘나’라는 인물은 객관적이지 않고 ‘나’의 행동과 말, 생각은 자신이 보여주는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독자들이 신뢰할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하기엔 어려운 화자가 된다.

시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결국 작품의 주제의식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작품 속의 인물들을 모두 위선적인 인물들로 설정한 후 그 인물들의 행동을 화자인 ‘나’를 통해서 그리고 인물들의 가식과 위선은 ‘나’의 인물 평가를 통해서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인물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 극대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가치가 전도된 삶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이 잘 드러난다.

 

「옥수수와 나」의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가장 먼저 소설의 처음과 끝에 지젝의 농담을 사용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농담을 인용해 그 안에 나타나는 닭과 옥수수의 이미지를 가져와 출판사 사장과 소설가 박만수를 대입시켜 대비되게 나열해 놓고 있다. 그리고 「옥수수와 나」에서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인물간의 대사는 인물의 성격이나 생각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사건이나 상황을 진행시키는 역할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화자가 설명하지 않고 대사를 통해 사건과 상황을 속도감 있게 진행시키는 것이다.

김영하는 자신을 옥수수라고 믿어 닭들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고 말하는 환자의 말을 이용한 지젝의 농담을 가져와 소설가 박만수에게 대입시킨다. 이 농담을 통해 “자신의 세계에 빠져 주변적이고 타자의 생각을 자기화하여 욕망으로 객관화하지 못할 때 인간들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적이고 상징 효과가 있는 현실에게 왜곡되는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까지 살펴본 자기 위선적이고 욕망하는 인물상과 1인칭 시점의 각도 등이 합쳐져 결국 「옥수수와 나」는 물질만능주의의 사회 안에서 가치를 상실한 채로 욕망만이 가득한 인물들의 모습, 도구화된 인간과 그에 따라 파괴된 인간관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옥수수와 나」를 통해서 이 시기의 김영하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와 그 사회 안에서 의미를 잃고 오로지 욕망만 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통렬히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참된 삶’의 추구 혹은 세월호 이후 김영하 소설이 드디어 말하기 시작한 것 –「아이를 찾습니다」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세월호 문학은 ‘세월호 사건’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간접적으로 혹은 알레고리적으로 다룬 작품들로 존재한다.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도 역시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이야기를 담아 우회적으로 세월호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가의 말을 보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이를 찾습니다」를 구상하고 서두를 써둔 것은 몇 년 전, 해외 체류 시절로 지난해 봄에 일어난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묻어두었던 초고를 서랍 속에서 다시 꺼내 집필에 착수한 것은 그 일이 일어난 직후였으니 쓰는 내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p.269)

 

그러면서 작가는 “이 소설을 기점으로 지난 칠 년간의 자신의 삶도 둘로 나뉘었다”(p.270)고 했다. 이는 세월호를 기점으로 작가 본인의 삶과 작품이 변화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아이를 찾습니다」는 그 동안 써오던 작품과는 조금 다른 양상은 띤다. 앞질러 결론을 말하자면 세월호 사건 이후, 김영하의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보자면 「아이를 찾습니다」 이후, 김영하 소설의 초점은 냉소적 주체들의 파괴된 인간 관계에 대한 냉소적 비판에서 ‘참된 삶’의 길을 찾지 않고는 냉소적 주체들의 파괴된 인간 관계가 가져오는 비극을 막아세울 수 없다는 쪽으로 옮겨간다. 줄여 말하자면 세월호 사건 이후 김영하의 소설은 현재의 상징질서에 대한 냉소적 비판에서 또 다른 상징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희망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거니와, 「아이를 찾습니다」는 그 기점을 이룬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3살 아들을 잃은 부부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평소와 다를 것 없었던 주말, 윤석과 미라는 “두 돌을 앞둔 아들 성민”(p.45)을 데리고 대형마트를 찾았다. 그리고 윤석이 핸드폰에, 미라가 화장품에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 아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형마트를 돌아다니며 찾아보지만 사라진 아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초점이 맞춰진 인물은 3살 아들을 잃은 그 시점부터 전부가 무너져버린 한 부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사람은 최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아들을 납치당하는 바람에 그들의 삶이 전부 망가지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본인들이 한 눈을 파는 동안 발생한 일이다. 본인들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아들을 잃을 일도, 삶이 모두 망가지는 일도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장 먼저 서로를 원망한다.

 

“무지는 인간을 암흑 속에 가둔다. 그들 인생에서 사라진 이삼 분이 그 암흑 속에 있었다. 그들은 그 암흑으로 들어가 서로에게 상처를 냈다. 이 무신경한 엄마야, 화장품을 사러 갈거면 말을 했어야지. 미라는 반격했다. 누가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서 애도 내팽개칠 줄 알았나.” (p.49)

 

“둘은 상대방의 부주의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싸움은 상대의 숨겨진 무의식까지 넘겨짚으며 위험구역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원래 애를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대신 벌을 받은 거라고! 미라가 소리를 지르면 윤석은 한때 낙태를 고려했던 미라를 비난했다. 애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너야. 도대체 그놈의 직장이 뭐라고, 애는 천천히 낳으면 된다고 말했던 게 바로 너 아니었어?” (p.66)

 

하지만 서로를 향하는 원망은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 아들이 돌아오는데 조금도 기여하지 못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들이라는 전부를 잃는 상실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두 사람은 이 상실에 대해 「옥수수와 나」에 나오는 ‘나’와 ‘나’의 주변 인물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상실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 연기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급급했던 「옥수수와 나」와는 다르게 이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안하지도 않고 괜찮아보이도록, 그럴싸해보이도록 연기를 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실의 상태를 극복하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상실을 인정하고 행동할 뿐이다.

 

“처음에는 미라도 전단지 뭉치를 들고 함께 돌아다녔다. 윤석은 아이를 찾으러 다니기 위해 정규직으로 다니던 자동차 회사를 그만뒀다. 미라도 다니던 서점을 그만두었다. … 이들은 아이를 찾는 일에 모든 것을 던졌다. 얼마 안 되는 저축을 모두 날리고, 보험을 해약하고, 아파트까지 팔아 몇 년을 버텼다.” (p.54)

 

“윤석은 밤에 공사장에서 자재를 지키는 일이나 야간 경비 일자리들을 전전했다. 하루에 평균 다섯 시간도 자지 못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종교의식을 치르듯 아침마다 전단지를 돌렸고 주말이면 고물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미라는 미라대로 아이를 잃어버린 마트 근처의 주택가를 샅샅이 뒤졌다.” (p.54)

 

그렇게 “그들은 자위와 연기는 포기한 채 필사적으로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p.270) 그들에게 괜찮을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삼는 행위는 시간 낭비였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 어머니로 사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된 것이다. 그 어떤 무엇보다도 아들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최우선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아들을 찾아내는 것만이 그들에게는 전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처절하게 상실 이후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저 아들을 희망으로 두고 그 희망을 찾아내기 위해서.

아들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망가져버린다. 이 실종사건으로 인해 평범했던 한 가정은 완전히 망가졌고 윤석과 미라는 각각 신체적인 병과 정신적인 병을 얻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은 윤석과 미라가 앓는 증상을 통해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 사건이 세월호 사건의 유족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본 모든 사람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실감과 혹독한 정신적 상처를 남겼는지를 아프게 환기한다.

세월호가 남긴 치명적 상처를 이토록 밀도높게 형상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아이를 찾습니다」의 동시대적 가치는 압도적이라 평가할 만한데, 그러나 「아이를 찾습니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들의 실종과 실종 이후 부모들이 겪는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살을 베듯 고통스럽게 묘사하던 이 소설에 어떤 반전이 일어난다. 실종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온다. 그것도 윤석과 미라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으로.

 

“잠시 후 두 여자가 코밑이 벌써 거뭇거뭇해지기 시작한 아이 하나를 등 떠밀다시피 하면서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쭈뼛거리면서 발을 현관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있었다. 아이는 그가 그려왔던 성민이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들 부부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보였고, 그들이 오랫동안 배포해온 전단지 속의 소년과도 너무나 판이했다. 전단지 속 소년은 볼이 토실토실하고 눈매가 순한, TV드라마의 아역배우를 닮은 듯한 모습인데,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난 아이는 눈이 쭉 찢어진데다 살이 쪄 배가 불룩했다. 어딘가 욕심 사납고 성마른 데가 있는 아이로 보였다. 윤석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길에서 저 아이를 만났다 해도 절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거야.” (p.61)

 

“근데 저기요.”

성민은 아직 윤석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솔직히 그 경찰 아줌마 말을 아직도 못 믿겠어요.”

“뭘?”

“나 정말 유괴된 거 맞아요?”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던 윤석은 시선을 돌려 성민의 눈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뭐가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럴 사람 아니거든요. 정말이에요.” (p.76)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아들은 윤석과 미라가 자신의 친부모인지조차 믿지 못하며 오히려 유괴범인 여자를 자신의 친엄마라고만 여긴다. 무엇 하나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윤석이 철썩 같이 믿던, 아들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도 이미 깨져버린 지 오래되었다. 이 상황에서 갈등이 생겨난다. 이 작품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은 아버지 윤석과 아들 성민의 갈등이다. 이 갈등은 「옥수수와 나」에 등장하는 소설가 ‘나’와 출판사 사장의 갈등과는 다른 양상을 띤다. 「옥수수와 나」의 갈등은 인물의 욕망으로 인해 발생한 갈등이지만 「아이를 찾습니다」의 갈등은 상실로 인해 발생한 갈등이다. 윤석과 아들 성민이는 서로 다른 상실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이 아닌 것 같고 친부모님을 찾았지만 친부모님이 아닌 것 같은 그 괴리감에서 두 사람은 상실을 느끼는 것이다. 같은 것을 잃었지만 각자 생각하는 지점이 다르고 또 그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결국 두 사람은 대립의 지점에 서는 것이다. 이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두 사람의 상실은 서로가 채워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잘못 아니잖아요? 내가 유괴되고 싶어서 유괴됐어요? 엄마 아빠가 잘못해서 유괴된 거 아니에요? 근데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요?”

“잘못을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유괴범, 그 여자뿐이야. 네가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 그 미친년이 우릴 이렇게 만든 거야.”

“지나간 걸 어떻게 바꿔요? 누가 잘못을 했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살면 안 돼요?” (p.81)

 

상실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또 희망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은 윤석이 살아가게 하는 원인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정신병에 걸린 아내도 자신을 친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는 아들도 멀게만 느껴지는 낯선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윤석은 이들에게 의지하고, 아내 미라와 아들 성민도 윤석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가 미친 아내를 떠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윤석이 정신 나간 아내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p.71)

 

그들은 그렇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버텨내는 것이다. 상실 그 이전의 완벽했던 모습을 되찾을 수 없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삶이지만 그 삶도 결국은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찾습니다」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간절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인물들은 균형이 무너지면 모두 함께 무너진다. 스스로 완벽한 모습을 유지할 수 없던 윤석은 “미쳐가는 아내와 자기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아들”(p.64)에게 의존해 균형을 이루며 간신히 살아간다. 그런데 윤석은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p.71)인 아내를 너무도 허무하게 떠나보낸다. 그리고 또 다시 아들을 잃어버리게 된다. 살아가는 원인이 되었던 존재들이 다시 부재하게 된 것이다. 균형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 불균형 안에서 윤석은 또 다시 살아낸다. 다시 한 번 상실 속에서 삶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다. 이 두 번의 실종 혹은 상실을 통해 「아이를 찾습니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누군가 소중한 존재를 눈앞에서 잃는다는 것은 잠깐의 부주의 때문이 아니다. 총체적 부실 탓이다. 그러므로 소중한 존재를 눈앞에서 잃은 사람은 단지 소중한 존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 왜 그때 그 순간 그 소중한 존재를 지키지 못했는지, 그때의 삶의 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반추하고 그 실체가 밝혀지면 자신의 전체를 반성하고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소중한 존재에 대한 인간적인 예의고 진정한 애도이다. 그래야만 또 다시 소중한 존재가 어떤 형식으로든 귀환했을 때 그를 진정으로 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 없이 단지 그를 그리워하기만 하면 그것은 그 소중한 존재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그가 혹은 그런 존재가 또 다시 귀환했을 때 또 한 번 잃게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소중한 존재의 상실 이후 가져야 할 태도는 그를 단지 그리워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죄책감을 갖고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옥수수와 나」와 다르게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화자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인물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 바라보며 서술하기 때문에 1인칭보다 객관적이고 보다 정확하게 사건과 상황,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서술한다. 3인칭으로 진행이 되니 서사가 냉정하고 침착한데, 거기에 감상이 끼어들지 않는다. 「옥수수와 나」는 화자 ‘나’가 각각의 사건과 인물의 말과 행동을 서술하면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을 끼워 넣어 독자에게 자신의 감상을 흘려 넣는데, 「아이를 찾습니다」는 화자의 개인적인 감상이 끼어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조금 더 객관적이라고 느끼고 판단과 감상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3인칭 시점을 이용해 이야기를 진행시킨 것은 결국 이 작품이 세월호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2014년 4월부터 꽤 오랜 시간을 1인칭 시점에서 세월호를 바라봐야만 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집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자극적인 영상과 글의 반복은 피로도를 높여 오히려 반발심을 갖는 세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결국 또 사회는 반으로 갈라져 진영논리에 따라 세월호는 이리저리 찢어져야 했다.

「아이를 찾습니다」의 화자가 객관적이고 감상을 배제한 관점으로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듯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세월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견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찾습니다」 작품은 표현상의 특징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는 대사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앞의 작품 「옥수수와 나」에 비해 대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이를 찾습니다」의 대사는 매우 협소한 역할만을 수행한다. 인물의 생각 서술에 그치는 정도이다. 사건의 진행이나 상황의 전환 같은 역할은 모두 화자의 서술에 맡기고 있다. 「옥수수와 나」의 대사가 조금 더 넓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작품 안에서 상징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찾습니다」의 중요한 상징물은 ‘전단지’이다. 이 전단지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상징물이다. 가장 먼저 이 전단지는 윤석과 미라의 11년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다. 윤석과 미라는 아들 성민이를 잃어버리던 그 시점부터 11년 동안 전단지를 돌리면서 아이를 찾기를 기대했다. 그 “전단지는 집안 어디에나 있었다. 화장실에도, 하나밖에 없는 방 구석구석에도, 심지어 미라의 낡은 핸드백 속에도 가득 있었다.”(p.54) 전단지를 돌리던 11년 동안 그 전단지는 윤석과 미라의 곁에서 떨어져본 일이 없다. 항상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고 가장 먼저 챙겨들던 것이다. 그리고 “도배도, 수리도, 건강검진도 성민이를 찾을 때까지 유보”(p.63)시켜 놓고, 또 생기는 돈은 거의 전단지에 투자했다. 그 11년의 세월동안 윤석과 미라는 전단지를 위해서 무엇이든 다 했다. 이처럼 전단지는 윤석과 미라의 치열하고 애처로운 11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두 번째는 아들 성민이를 다시 잃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전단지의 사진은 “사진관을 하는 윤석의 친구가 성민이 성장했을 때를 가장한 포토샵 사진을 해마다 새로 만들어주었다.”(p.55) 전단지는 윤석과 미라에게서 떨어져 본적 없는 물건이고 매해 사진을 바꿔가며 새로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윤석과 미라에게는 전단지에 붙어있는 포토샵 사진이 곧 성민이가 되는 것이다. 그 포토샵 사진의 성민이가 더 익숙하고 무의식중에 성민이가 진짜로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매끈하고 아역배우 같은 성민이만 성민이인 줄 알고 살던 두 사람 앞에 그와는 정반대로 생긴 아이가 성민이라고 등장하자 윤석은 매우 당황하며 전단지 속의 포토샵 사진과 너무 다른 성민이를 낯설게 느낀다. 아들이 아니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포토샵 사진의 성민이와 실제 성민이 사이의 괴리감 안에서 윤석은 진짜 성민이를 차마 받아들일 준비를 마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시 한 번 더 성민이를 잃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찾습니다」는 김영하의 이전 작품들과도 문학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만 다른 세월호 문학과도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세월호 문학은 많은 경우 소중한 존재를 잃고 난 후 드는 상실감과 죄책감에 대해 서술했다. 또 상처받은 많은 이들을 치유하기 위한 글들이 등장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생중계되는 세월호를, 시간마다 잔인한 말들을 자극적으로 선전하는 언론을 우리는 버텨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상실감과 죄책감에서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한 장면을 더 추가해 서술해나갔다. 바로 잃어버린 존재가 돌아오는 장면이 그것이다. 잃어버리고 상실감과 죄책감, 슬픔 속에서 괴로워하는 마음을 그려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돌아오는 장면을 넣어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새로운 전개를 맞이하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아이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행복해지지 못한다. 내가 바라던, 내가 생각하던 아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인물은 매우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가 돌아온 것 자체를 불행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있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편한 상황들과 혼란스러움에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하는지에 대한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는 중에 돌아온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엔 또 다시 한 번 더 아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많은 소설들이 그저 잃어버림에 대한 상실감을 다룰 때 김영하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아이를 찾게 되는, 아이가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삽입한다. 왜 작가는 이런 독특한 장면을 넣었을까? 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단 가장 기초적인 관점에서 존재하는 세월호 문학은 일종의 정형성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것과는 조금 다른 장면을 삽입해 그 정형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새롭게 읽도록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를 되찾는 것,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되찾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를 찾습니다」같은 경우에도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다면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와도 상실한 그것을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되돌아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가 언급한대로 “우리의 인생에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며, 그런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남은 방법이 없고 그 이후를 견뎌내는 것이 전부”(p.269)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 기억하는 것 역시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 기억에 매몰되어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것 자체에만 머물러선 안 되는 것이다. 전단지 안의 성민이와 실제로 만난 성민이 사이의 괴리감이 윤석과 미라로 하여금 찾았던 아이를 다시 한 번 잃어버리게 했다. 한 번 더 이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4. 세월호 이후의 김영하를 기다리며 혹은 기대하며

 

2014년 4월 진도에서 발생했던 충격적인 일은 많은 수의 기록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면서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세월호는 우리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 작가에게 세월호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2014년에 발표한 「아이를 찾습니다」와 그 이전 발표작 「옥수수와 나」를 비교 분석 했다.

「옥수수와 나」는 현대의 물질만능주의와 함께 도구로 전락한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해 잘 묘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행동하고 주변인물을 이용하는 철저히 계산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자신의 결핍이나 흠을 감추기 위해서 연기를 하거나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와 다르게 「아이를 찾습니다」의 경우 상실을 맞이하는 자세가 상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자기 위로와 괜찮은 척 연기는 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망가지고 온전하지 않은, 상실 그 이전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며 결국 그렇게 삶을 살아낸다.

「옥수수와 나」는 인간의 욕망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1인칭 시점을 사용하는 것과 반대로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는 각 인물과 사건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자세로 서술하는 3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상실을 경험한 각 인물들의 생각이나 심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진행과 그에 따른 인물들의 행동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3인칭 시점을 이용했다.

또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 문학이지만 다른 세월호 문학과는 다른 지점이 존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여타의 세월호를 다룬 작품들은 ‘상실감’에 대해서 서술한다. 소중한 존재를 잃고 맞이한 상실감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대해 주목했고 또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반성과 성찰을 담아냈다. 그러나 「아이를 찾습니다」는 상실에서 멈추지 않고 아이가 돌아오는 장면이 서술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인생에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며, 그런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남은 방법이 없고 그 이후를 견뎌내는 것이 전부”(p.269)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아이를 찾습니다」이후 커다란 변화를 겪을 것 같았던 김영하 문학은 그러나 아직 고요하다. 문학외적인 활동은 활발하고 또 희곡에 손을 대기도 하나 정작 소설을 찾아보긴 힘들다. 그만큼 ‘참된 삶’에 도달하기 위한, 혹은 ‘참된 삶’이 우리 사회에 주도적인 삶의 형식이 되도록 하기 위한 치열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과연 김영하가 찾아내는 ‘참된 삶’의 형식이 무엇일지. 이것만큼 가슴 설레는 기다림은 없을 것이다.

참고문헌

 

1. 김영하, 「옥수수와 나」, 『오직 두 사람』, 문학동네, 2017.

2. 김영하, 「아이를 찾습니다」, 『오직 두 사람』, 문학동네, 2017.

3. 김영삼, 「세월호 ‘사건’과 ‘사건’ 이후 문학의 가능성 Ⅱ」, 현대소설연구, (70), 2018.

4. 김천혜, 『소설구조의 이론』, 한국학술정보(주), 2010.

5. 김형중, 「문학과 증언 : 세월호 이후의 한국문학」, 2013.

6. 이상우, 「김영하의 소설 옥수수와 나 연구」, 국어문학, 56, 2014.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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