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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회 황룡학술문학상 문학부문 가작 (문학평론)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문학에 나타난 애도 양상 연구 - 『레몬』, 「무언가의 끝」, 「입동」을 중심으로
관리자 | 승인 2019.12.31 |(0호)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문학에 나타난 애도 양상 연구

- 『레몬』, 「무언가의 끝」, 「입동」을 중심으로

 

1. 세월호 사건과 애도 

2. 집착과 복수, 혹은 애도의 불가능성: 권여선의 『레몬』의 경우 

2.1. 애도 작업으로서의 집착 

2.2. 죽은 이로 살기: 동일화 작업 

2.3. 복수와 선택적 삶 

3. 환상과 떠돌이의 행로: 임현의 「무언가의 끝」의 경우 

3.1. 유산 속에서의 삶 

3.2. 붉은 토끼의 환상 

3.3. 상실자의 떠돌이적 행로 

4. 타자화된 상실자의 애도: 김애란의 「입동」의 경우 

4.1. 아이 잃은 부모의 사회적 타자화 

4.2. 벽지 갈기: 리비도의 철회 

5. 바람직한 애도의 가능성 

 

 

1. 세월호 사건과 애도

1.1. 애도 담론 형성과 문학적 작업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토록 인간의 죽음이 당연함에도, 죽은 이와 함께 한 기억이나 그의 행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를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애도 작업에 착수한다. 죽은 이를 땅에 묻거나, 불에 태워 뼛가루를 보관하거나, 그 위에 나무를 심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죽은 이를 기리고 기억하려 노력한다. 그 과정은 찾아올 고통에 대한 준비가 어떠했는가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아주 어려울 수도 있다. 혹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든지 간에 재난적인 고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렇도록 애도 작업이란 많은 준비와 고통을 수반하고, 또 그만큼 세상 모든 이들에게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애도의 연구의 시작은 한 세기도 더 전인 1917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Mourning and Melancholia)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애도 이론은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로 ‘리비도’를 제시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우리를 몰고 가는” “심리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 리비도를 투자하던 누군가가 죽어서 사라지면 그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려 일부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리비도를 분리하여 애도 작업을 완수하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 이 과정은 프로이트조차 고통스럽다고 할 정도로 어렵지만, 얼마나 고통스럽든지 간에 결국엔 성공적으로 완수해야 하는 일이다. 왕철은 이 이론이 말하는 바가 “사회가 일반적으로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그다지 다를 게 없”으며 “사회는 우리에게 늘 죽음을 성공적으로 애도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요구한다”고 표현했다. 따라서 성공적인 애도란 죽은 이의 부재에 과도하게 얽매여있지 않고 얼마간의 시간 후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죽은 이로부터 회수한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투자할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의 이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상태에서 다른 관점에서의 애도를 논한 자크 데리다는 “애도작업의 성공만이 긍정적인 것이고 실패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어야 하는지”인지 물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과의 결별이 시작되는 지점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책임”이 탄생하는 지점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기억의 내면화를 통한 애도 작업에 대해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는 것이라며 일종의 “배반행위”로 칭한다. 그러면서 그는 타자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면서도 우리의 일부가 되지 않으며 타자성을 유지하는 존재라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애도이론을 계승한 아브라함(Nicolas Abraham)과 토록(Maria Torok)이 『외피와 핵심』(The Shell and the Kernel)에서 제시한 “내사”(introjection)와 “융합”(incorporation) 역시 데리다에게 비판받는다. 왕철에 따르면 이들이 말하는 “내사”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좋은 기억과 속성들을 자신의 일부로 동화시키는 정상적 애도를 의미하고, “융합”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속성을 자기화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지하묘지”를 만들어 그를 살아 있도록 하는 비정상적 애도를 의미한다.

위에 연구된 바와 같은 갖가지 애도의 양상은 꼭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죽음은 불특정 다수의 애도 작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쟁, 테러, 대형사고, 혹은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의 죽음 등이 그러하다. 가깝게는 넬슨 만델라의 죽음(2013), 세월호 참사(2014), 파리 테러(2015) 등이 그 예로 꼽힌다. 특히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 국민의 가슴에 멍처럼 남아 버린 대형사건이자 시대의 상처였다. “2015년 한겨레 신년 여론 조사에서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50대 이상은 6.25 한국전쟁을, 40대 이하는 ‘세월호 참사’를 꼽았다”는 자료가 그 거대한 사회적 애도를 증명한다.

세월호에서 시작된 애도의 흐름은 문학계에도 당도했고, 이는 곧 수많은 작품들로 나타났다. ‘세월호 소설’이 “불가능한 애도에 ‘공감’하고 재현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주력”하며 “사회적 트라우마와 기존 세월호 담론을 함께 극복하는 사례”라는 정의는 ‘트라우마’의 형태로 전 사회 구성원이 가져 버린 불가능한 애도를 다루며 이 상처를 문학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이로써 일제강점, 한국전쟁 등 거대한 국가적 사건을 겪으며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애도 담론을 문학이라는 형태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1.2. 해당 작품 및 연구 검토

그중에서도 본문에서 다룰 권여선의 장편소설 『레몬』, 임현의 단편소설 「무언가의 끝」, 김애란의 단편소설 「입동」은 각각 언니, 아버지와 지하방에 살던 남자와 형, 아들을 죽음으로 떠내보낸 사람들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문학적 애도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로 『레몬』은 수정, 보완되기 전 이름인 「당신은 알지 못하나이다」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의 연구가 수행되었다. 박선경은 사건 자체와 연관성이 없는 희생자 ‘해언’의 외모와 성품이 강조되는 양상을 놓고 유족의 애도를 모욕하며 희생자를 범주화하는 공권력과 언론의 시선을 역설적으로 유족이 끌어안는 현상이라고 보며, 이 때문에 해언에 대한 개별적인 애도가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어 사회적인 애도가 가로막히는 형국이라고 보았다. 김정선은 애도의 실패가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양상으로 이 작품을 들어 다언의 행동을 ‘기록, 성형, 유괴’로 요약해 ‘시(詩)’라는 감각적 개념으로 표현된, ‘애도 성공’과 ‘멜랑콜리’라는 상반된 감정으로 만들어진 소설의 긴장감을 설명했다.

둘째로 「무언가의 끝」이라는 작품은 아직까지 선행된 연구가 없다. 작가 임현에 대해서도 아직 학술적 논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본고에서의 논의가 단독적인 형태로서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입동」은 『레몬』에서와 같이 박선경에 의해 선행 연구되었다. 그는 「입동」의 주제를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애도 불가능성’으로 보고 소설에서의 부모가 겪는 ‘사건’ 이후의 삶과 사람들에게서 받는 선정적 관심을 비추어 소설이 세월호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1.3. 연구방법 및 범위

본문에서는 각 작품별로 다르게 그려지는 애도의 양상을 분석하고, 그것이 애도의 주체에게 주는 의미와 변화를 찾아 바람직한 애도의 가능성을 논하고자 한다. 소설들은 2019년(『레몬』)과 2017년(「무언가의 끝」, 「입동」)에 발표되었고, 「무언가의 끝」과 「입동」은 단편소설이며 『레몬』은 장편소설이다. 장편소설은 애도 주체의 적극적인 기억 작업과 실체적 행동에 집중하고, 두 단편소설은 죽은 이와 함께 생활했던 공간인 ‘집’이 주는 기억의 파편과 애도 주체의 정서적 변화에 집중한다. 작품의 논의 순서는 『레몬』, 「무언가의 끝」, 「입동」이며 이는 결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애도의 가능성’에 의거해 가능성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에서부터 가까운 것의 순서이다.

첫째로 논의할 『레몬』에서는 애도 작업으로서의 집착과 죽은 이 ‘해언’과의 동일화, 애도 주체가 행하는 실체적인 복수 행각과 그로 말미암아 짊어질 앞으로의 삶이 제시된다. 본고에서는 ‘다언’의 심리적 변화와 그에 따른 행동의 분석을 통해 적극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애도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로 논의할 「무언가의 끝」에서는 죽은 이들과 함께 생활했던 ‘집’이라는 공간을 포함해 실체적 존재로 남아 있는 갖가지 유산 속에서 주인공이 반추하는 기억들과 주인공이 겪는 ‘붉은 토끼’의 환상, 그리고 정처 없이 걸어 돌아다니는 떠돌이적 행로가 제시된다. 해당 작품에서는 인물이 적극적으로 취하는 애도의 모습을 분석하기보다는, 정적 공간 속에서 이전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정서의 일면에 가끔 ‘붉은 토끼’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트라우마적 심리를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로 살펴볼 「입동」에서는 아이를 잃은 부모가 사회에서 타자화되는 양상을 살펴보고, 외면한 채 쓰지 않던 보험금을 쓰기로 결심하고 죽은 이와 함께 했던 공간의 일부를 바꾸어 죽은 이에게 투자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작업을 논의해 바람직한 애도의 가능성이라는 결론으로 진입해보고자 한다.

2. 집착과 복수, 혹은 애도의 불가능성: 권여선의 『레몬』의 경우

 

2.1. 애도 작업으로서의 집착

소설의 주요 인물인 ‘다언’은 직접 보지도 못한 ‘만우’의 취조 장면과 ‘해언’의 죽음, 그리고 그녀와의 기억 등을 의도적으로 반추하며 기억 작업을 행한다. ‘만우’의 취조 장면에 대한 기억은 사실 ‘다언’이 직접 본 장면이 아니므로 상상인데, 이는 멋대로 꾸며내 만든 것이 아니고 “사건에 얽힌 세부, 장면, 정황 들을 십육년 넘게 꼼꼼히 생각하고 쓰다듬고 세공해” “직접 보거나 겪었던 것만 같”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면은 오로지 ‘다언’의 것이기에 그녀의 입장과 주관이 개입하게 된다. 실제 그곳에 존재했던 인물이 알지 못했던 것을 그녀가 눈치챘다면 그를 상상에 더하여 어떠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태림이도 봤을지 모른다. 이 말에서 형사는 소년의 위증을 확신했지만 나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날 윤태림은 신정준의 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만우의 스쿠터를 타고 뒤쫓아가 그 앞에 세우라고 했을 것이다. 이 얘기는 한만우의 머리로는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미묘한 진실을 품고 있다.(p.27.) (...) 얼간이 형사는 몰랐겠지만, 스쿠터 타는 걸 창피해하는 여자애가 얼간이 소년의 배달 스쿠터를 얻어 타고 신정준의 차를 추월하라고 재촉한 다음 얼마 안 가 내렸다면 그애의 급한 일은 명백한 것 아닌가. 신정준의 차에 누가 함께 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태림은 그 차에 언니가 타고 있는 걸 확인했고, 목적을 달성한 후 곧바로 스쿠터에서 내렸다. 그때 태림이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태림의 눈에 언니는 얼마나 아름답고 무심하고 잔인해 보였을까.(p.29.)

 

이런 와중에 ‘다언’은 자신의 상상에 “과잉된 디테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를테면 벽돌로 가격당할 머리가 “매끈한 머리칼”(p.33.)을 갖고 있다고 한 것이 그 예시이다. 이는 죽은 ‘해언’에게 갖고 있던 ‘다언’의 욕망이자 그녀의 얼굴을 “조잡한 조각보처럼 성형하게 만든”(p.34.) 집착이다. 이 부분적으로 과잉된 기억은 비단 ‘다언’만의 것이 아니어서, ‘해언’의 죽음은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으로 불렸다. 여고생과 살인사건은 객관적인 사실을 담은 단어지만, ‘미모의’는 주관적 판단이다. 이 역시 부분적으로 과잉된 인식이다. 이 부분에 대해 박선경은 사건 자체와 연관성이 없는 희생자의 외모가 강조되는 양상이 희생자를 범주화한다고 보고 이 때문에 죽은 이에 대한 애도가 개인적 수준에 그쳐 사회적 애도가 가로막힌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해언’의 외모가 작품 전면에 걸쳐 자꾸 부각되는 것은 작품이 갖는 문제의식이자 장치이다.

‘다언’의 기억 작업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해언’의 죽음이 있고 2년 반이 흐른 뒤, 언니가 죽은 공원에 간 ‘다언’은 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 공원에서 언니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곳에서 ‘다언’은 자신의 “위치와 시점을 알지 못”(p.91.)하고, 점점 기억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 간다. 단단한 것에 머리를 맞아 숨진 것은 자신이 아닌 언니 ‘해언’임에도 ‘다언’은 무언가가 부딪치거나 깨지는 소리를 듣거나 상상하게 되면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파열음과 굉음 들이 만들어내는 타는 듯한 지옥도”(p.93.)의 “환영을 보는 내내 피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죽은 이에게서 전치된 트라우마의 반복은 곧 ‘다언’의 향후 행동을 동기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2.2. 죽은 이로 살기: 동일화 작업

‘해언’은 이미 죽어버린 인물이지만 그녀를 정상적으로 애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산 자에게 투사되어 나타난다. ‘다언’의 외모와 ‘혜은’의 존재가 그것인데, 첫째로 ‘다언’의 외모는 앞서 언급했듯 “조잡한 조각보처럼 성형”(p.34.)해 본래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엄마가 자신을 통해 언니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 ‘다언’은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비틀린 경로로 우회”(p.88.)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미 언니의 이름을 바꾸는 데 실패한 엄마는 ‘다언’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그렇게 ‘다언’은 마음도 얼굴도 이전의 ‘다언’이 아니게 되었다. “불안증 환자들처럼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고 취소하고 반복하는 경련의 삶”이 제 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앞으로 내가 누구로 살게 될지 모르면서 울었다”(p.92.). 죽은 이와의 동일화는 완벽할 수 없어서 사실상 실패하고, ‘해언’도 ‘다언’도 남지 않은 상황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둘째로 ‘혜은’의 존재는 이다음 장에서 논하게 될 ‘복수’의 산물이자 ‘엄마’에게는 곧 ‘해언’이 된 아이이다. 아이의 이름은 본래 ‘예빈’이었고 ‘해언’이 어릴 때 그러했듯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표현된다. 얼굴을 바꾸는 것으로는 애도를 완성할 수 없었던 ‘다언’이 ‘정준’과 ‘태림’의 아이를 유괴해 자신의 아이로 키우게 되면서 ‘엄마’는 다시 ‘해언’, 즉 ‘혜은’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자신을 죽은 이로 바꾸는 것보다 더 극단적인 동일화 작업으로, 명백한 범죄이자 본래 ‘예빈’이었던 무고한 ‘혜은’의 삶의 뿌리를 완전하게 바꿔 놓는 일이다. 또한, 죽은 이의 자리에 다른 살아있는 이를 억지로 끼워 맞추었으므로 전체 가족 역시 이때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 선택적 삶에 대한 논의는 다음 장에서 이어 하도록 하겠다.

 

2.3. 복수와 선택적 삶

엄마가 무어라 이르는 소리, 아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웃음소리는 내게 죄를 알리는 종소리 같다. 아이는 곧 초등학교에 가고 나는 학부형이 될 것이다. 열일곱살 6월까지도 나는 내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이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살고 있으니, 이 삶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원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선택한 적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pp.34-35.)

 

‘다언’의 복수와 앞으로의 삶은 위의 문단에 모두 집약되어 있다. 많은 복수가 그러하듯 ‘다언’의 복수 역시 처음부터 유괴의 목적을 띠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언니를 살해한 범인으로 ‘만우’를 의심했던 ‘다언’은 긴 고민 끝에 일단 ‘만우’를 만나서 보고 난 이후에 어떻게 살지를 결정짓기로 결심했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무릎 아래가 절단된 ‘만우’의 다리를 보고 “천벌 받은 거”(p.120.)라며 지독한 말을 쏟아냈다가, ‘해언’이 살해당한 사건의 전말을 알고 나서는 목적도 없이 계속 그의 집을 드나든다. 그 연유는 모종의 죄책감일 수도, 목적을 잃은 에너지일 수도 있겠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목적이 필요한데, 그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렸으니 관성처럼 바로 이전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우’의 여동생 ‘선우’와도 친해진 ‘다언’은 남매의 가족사를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했다. 얼핏 ‘약자들의 연대’의 표상으로도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그것이 언니든 다리든 아버지든 간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갖는 우애였다. ‘다언’은 난쟁이인 남매의 엄마까지 보고 나서 불현 듯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다. ‘예빈’이었다가 ‘혜은’이 된 아이는 그렇게 해서 ‘다언’의 딸이 되었다.

그 후로 ‘다언’은 당연히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고, 우연히 마주친 ‘상희’에게만 힌트처럼 ‘해언’의 원래 이름이 ‘혜은’이었던 것과 ‘엄마’가 아직도 무언가를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유잉육종에 걸려 불구로 살다 서른에 죽어 버린 남자(‘만우’)의 이야기를 한다. ‘상희’는 앞으로의 ‘다언’의 삶이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p.190.)는 삶이 되었음을 깨닫고 그 무게를 버거워한다. 본디 애도 작업이었던 무엇은 어느덧 “끔찍”하게 변해 실패한 애도로 변모했다.

‘다언’의 애도는 죽은 이를 명확히 재현하지도, 죽음 그 자체로 놓아두지도 못했으므로 명백한 실패로 돌아갔다. “한만우의 죽음을 경유함으로써”(p.199.) “언니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다언’의 독백은 있는 그대로 신용할 수 없다. “살아 있음”으로 충분하다면 “아무도 모를 죄책감과 기나긴 고독”이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을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버린 탓이다. 고통을 외면한다는 것은 ‘다언’이 가진 트라우마도 해소되지 못하고 남아있다는 뜻이고, 트라우마는 결국 고통의 장소, 고통의 시간으로 자꾸 회귀하는 것이므로 ‘다언’의 나머지 삶은 결코 충분치 않은, 죽음이 “허섭스레기”(p.179.)와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놓았던 삶의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3. 환상과 떠돌이의 행로: 임현의 「무언가의 끝」의 경우

 

3.1. 유산 속에서의 삶

모두가 죽거나 떠나 주인공만 남은 이 집은 본디 ‘아버지’의 것이었다가 ‘형’의 것이 되었고, 그러다가 ‘나’의 소유가 되었다. 집은 가족의 역사와 규칙, 추억을 모두 실체적으로 반영하고, 그 자체로 ‘유산’으로서 기능하므로 이 집에서 ‘나’가 혼자 산다면 그것은 유산 속에서의 삶이 된다. ‘나’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집안 물건들의 대부분을 그대로 두기로 했고, 유품 중에는 소각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으므로 가끔 마주칠 때마다 우울을 느끼거나, 자주 쓰는 물건의 경우 자신의 것처럼 익숙하게 쓴다. 이렇게 보면 ‘나’는 문제없이, 괜찮게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마주치는 우울을 간과하기엔, ‘나’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다. 소설 내에서는 ‘나’가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제시되지 않으며, 나가더라도 근처를 떠돌 뿐 동선이 길게 늘어나지 않는다. 사는 동네도 “골목이 많고 버려진 게 많은 동네”로 묘사되면서 주인공이 집 밖으로 떠도는 일이 덧없음을 보여주고, “방을 놀리면 놀리는 만큼 비용을 아껴 생활해야”(p.127.)하고 “여전히 아래층에 세를 놓고 그것으로 먹고산다”(p.145.)는 것이라면 따로 직업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벽에 귀를 대고 수도관이나 보일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벽지가 누렇게 변색되고 욕실 타일이 망가져도 그대로 두는 정적인 삶이 ‘나’의 삶이다. 꼬집어 역기능적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긍정적인 방향이라고는 할 수도 없다.

그의 애도 역시 매우 정적인 방향으로 행해졌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땐 ‘나’가 어렸음을 감안하더라도, ‘형’이 죽었을 땐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 쪽으로”(p.144.) 그 죽음을 받아들였고 형의 기억을 반추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기억의 공유 작업은 정상적인 애도 과정의 초기 단계인데 이는 특히 분리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3.2. 붉은 토끼의 환상

‘나’는 ‘아버지’, 지하방에 살던 남자, ‘형’의 죽음을 순차적으로 겪으며 점차 심화된 정서 불안을 겪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때에는 온전한 형태의 “윤기가 좋고 가로등이 드는 밝은 곳에서 보면 분홍빛인 것 같기도 한 것이라 만지면 복슬복슬할 것 같”(p.131.)은 붉은 토끼를 발견했던 반면에, 불이 나 지하방의 남자가 타 죽었을 때에는 “밝고 선명한 빛깔의 그 토끼가 몸을 부풀”(p.140.)려 “종국에는 어마어마해”지고 “커지는 동안 붉고 진한 색은 점점 연해지고 털 사이로 팽팽해진 피부가 얇고 투명해”져 “투명해진 속으로 출렁거리는 내장도 보이고 얼굴이 넓적해서 토끼처럼 귀가 길어도 토끼 같지 않은 것이 괴상하고 불편”한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꿈을 꾸었다. 그러고 나서 ‘형’이 죽었을 때 주인공은 “아스팔트 위로 무언가 고였다 마른 자국을 보았”(p.141.)고 “그 자리쯤에 붉은 토끼가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서부터 주인공은 “꿈에 붉은 토끼를 보았으니 차 조심”하라고 말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런대로 잘 산다”(p.145.)고 진술하면서도 종내에는 “꿈에 붉은 토끼를 보게 될 것이 불안하다”고 속내를 내놓는다. 그는 형이 죽고 난 뒤에도 꿈에서 두어 번 그것을 보았고 사나흘이나 지나서야 안심하게 되었다.

 

그 사나흘간은 되도록 외출하지도 않고 집에만 있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 대부분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사건 사고를 챙겨 보며 견뎠다. 누군가 다치거나 죽거나 충돌하거나 무너졌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 그런 일들은 언제고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그게 내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랬으나 그 시간들을 모두 기다리면 여전히 나는 무사하고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에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p.146.)

 

‘붉은 토끼’의 악몽은 무의식으로 스며든 트라우마가 외부로 드러나는 증상이다. ‘붉은 토끼’와 죽음은 ‘나’에게 있어 아주 밀접한 관계의 개념들이 되었고, ‘붉은 토끼’든 죽음이든 어느 하나가 나타나는 것이 아주 두려운 일이 되었다. 베레나 카스트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기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고 했는데, ‘나’가 겪는 경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맛보기라면 ‘붉은 토끼는’ 그것이 나타나는 하나의 양식이자 트라우마다. ‘붉은 토끼’와 누군가의 실제 죽음의 연관성을 미리 파악해 입 밖으로 내놓지 못했고, 그런 꿈을 꾸어서 이런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비논리적 사고가 ‘나’의 불안을 심화시킨 것이다.

 

3.3. 상실자의 떠돌이적 행로

결국 ‘나’는 꿈을 피하기 위해 집밖으로 떠돌았다. 목적지 없이 멀리까지 가는 경우가 많았고, 당연한 곳에 있는 당연한 것들을 보며 “왜 나만 이러나, 왜 나만 이상하게 되었나”(p.142.) 하는 억울함에 빠져 울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자신 때문에 우는 ‘형수’를 보며 어려워했다. ‘형수’가 재가하여 떠나고 나서 ‘나’는 집에 혼자 남고, 누군가에게 길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부담스러움에 사로잡혀 한참을 고민한다. 이는 정서적 불안이 망각하게 만든 당연한 사실들과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에 사로잡혀 고착된 트라우마가 만들어낸 멜랑콜리적인 집착이다.

‘나’에 따르면 “어느 순간이 지나면 생각하지 않”(p.147.)게 될 일이지만, 그것이 트라우마를 떨쳐내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는 죽은 이와의 분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이제는 그를 함께 할 사람조차 떠나고 없다. 다 떠나고 혼자 남은 집에서 ‘나’는 늦은 애도를 수행해야 하고, 그 시간동안 “부재의 현존과 함께하는, 있음과 없음이 뒤섞인 시간”으로 부재하는 대상을 떠올리며 상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나’의 애도는 액면만 놓고 보았을 때 사회가 요구하는 일반적인 애도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나’는 꽤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가 보인 정적인 애도 양상과 불안정한 심리상태, 그리고 집의 주변부만 떠도는 동선을 보면 그는 역기능적이지만 않았다 뿐이지 바람직한 애도를 행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향후 행하는 일에 따라 애도의 국면은 전환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열려 있는 작은 가능성일 뿐이지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4. 타자화된 상실자의 애도: 김애란의 「입동」의 경우

 

4.1. 아이 잃은 부모의 사회적 타자화

아이를 잃은 부모의 삶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이때까지 해왔던 모든 일들에서 동기가 사라지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정신적 기반이 거세게 흔들린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슬픔의 절대적인 피해자가 바로 이들 부부의 사회적 위치다. 이러한 위치에는 잣대가 적용되고, 그것은 피해자를 피해자의 프레임에 가두는 폭력적 잣대로 휘둘러진다.

 

많다거나 적다거나 하는 세상의 어떤 잣대나 단위로 잴 수 없는 대가가 지급됐고, 어린이집에서는 그걸로 일단 일이 마무리됐다 여기는 듯했다. 운전사를 바꾸고 당시 현장에 있던 보육교사까지 잘랐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 묻는 듯했다.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우리를 대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그랬다. 내가 보험회사 직원이란 근거로 동네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문이 돈 것도 그즈음이었다. (...) 놀라운 건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그 말을 믿는다는 거였다. (...) 한번은 아내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십 분 만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길 본다고, 나는 안 그러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돌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피해자라는 이름표를 붙여 행동에 제약을 두려고 하는 사회의 몰인정한 시선은 피해자에게 다분히 폭력적이다. 보험회사 직원인 ‘나’는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의 슬픔을 이러한 사무적인 시선으로 대면했을 것을 반추하며 괴로워한다. 누구도 그렇게 극단적인 슬픔을 예상하고 살아가지 않기에 피해자의 위치가 분명할수록,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사건의 예측 가능성이 낮을수록 타자화의 농도는 짙어진다. 타인에게 동정이나 연민은 얻을지언정 공감을 얻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회의 무감함은 그 다음 사건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영우’의 일로 나빠진 평판을 무마해보려는 어린이집의 시도가 잘못된 대상을 찾아간 것이다. ‘아내’를 화나게 한 복분자액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졌고, 그것은 작은 사고에 의해 벽지로 흩뿌려진다. 부부가 집에 정을 붙이고 역사를 부여하려 했던, 추억 그 자체로 기능하는 올리브색 벽지 위로 말이다.

 

4.2. 벽지 갈기: 리비도의 철회

자정이 넘은 시각,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아내’가 벽지를 갈자고 제안하고, 남편인 ‘나’는 그에 따른다. 이는 한창이나 고통스러워하며 애도 작업을 해내던 부부가 성공적인 애도를 위해 리비도를 철회하는 전환적 국면이다. 괴로운 감정만 되살리는 흉물스러운 벽지를 갊으로써 애도 작업동안 고착되었던 집안의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시도 자체만으로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상실자에게 다분히 희망적이다. 부부는 오랜만에 힘을 합쳐 사건이 있던 그 날에 멈추어 있던 무언가를 바꾸어 나갔고, 그동안 머뭇거리며 할 수 없던 이야기도 꺼내게 되었다. 괜한 죄책감에 쓰지 못했던 보험금을 헐자는 제안은 부부가 현실을 자각하고 대처해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공유했던 공간에서 리비도를 철회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다. 그 장소가 집이기에 더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 그 자체로 역사이자 추억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의 끝」에서 아버지의 유품을 발견했던 ‘나’처럼, 이 부부 역시 아들이 남긴 것을 발견하고 만다.

 

그런데 바쁘게 걸레질하던 아내가 갑자기 꼼짝하지 않았다.

(...)

-여기…… 영우가 뭐 써놨어……

-……뭐라고?

-영우가 자기 이름…… 써놨어.

아내가 떨리는 손으로 벽 아래를 가리켰다.

-근데 다…못 썼어……

아내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직 성하고……

-……

-이응하고……

-……

-이응하고, 아니 이응밖에 못 썼어……(pp.34-35.)

 

아들 ‘영우’가 생전에 채 다 쓰지도 못한 이름을 발견하고 부부는 다시 슬픔에 잠긴다. 어쩌면 한동안은 다시 벽지를 못 갈 수도 있고, ‘영우’가 남긴 낙서만 바라보며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부부에게는 바람직한 애도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벽지를 갈기 전에도 충분히 보았을 ‘영우’의 흔적들을 부부는 이겨냈고, 이겨냈기에 벽지를 갈자고 할 수 있었다. 죽은 아들을 영영 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하고자 한 대로 보험금을 헐어 당장의 현실적 어려움을 이겨낼 수도 있고, 가끔 떠오르는 아들과의 추억에 괴롭더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5. 바람직한 애도의 가능성

 

이상의 세 작품을 통해 각각 언니, 아버지와 지하방에 살던 남자와 형, 아들의 상실과 인물의 애도 방식을 보았다. 언니의 애도는 기억 작업에서부터 외모적인 동일화와 아이 유괴까지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타났고, 아버지와 지하방에 살던 남자, 그리고 형을 잃은 인물은 언뜻 보면 가장 안정된 심리상태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붉은 토끼’라는 환상을 보고 비논리적 사고에 의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길거리를 떠도는 등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 아들을 잃은 부부, 그 중에서도 특히 아내는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고 사회로부터 타자화되는 양상이 있었지만 벽지를 갈자고 제안하는 등 고통을 딛고 재기할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람직한 애도는 완전히 죽은 이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죽은 이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고 각자의 애도 기간을 충분히 가진 뒤,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력하거나 그리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본론에서 언급했던 ‘사회가 바라는 애도’와 그 양상이 비슷해 보이나, 본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리만치 냉혹한 방식은 아니다. 데리다의 이론처럼, 기억 작업으로 타자의 일부를 내면화하되 자기화하여 그 원형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이따금씩 떠오르는 추억이나 마주치는 장면을 애도하며, 그리움이면 그리움으로 원망이면 원망인 대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수용하며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본고에서 논했던 세 작품은 「입동」에 가까울수록 바람직한 애도에 가깝다. 다만, 바람직한 애도와 그렇지 않은 애도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분절되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애도가 바람직한 애도를 향해 가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만 보아야 한다. 이때까지 나온 많은 문학 애도 연구에서는 이를 두고 애도의 불가능성이라 칭하지만, 결국 사람들은 그의 애도 양상이 어찌 되었건 간에 이따금씩 죽은 이를 잊기도 하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리비도를 회수하여 다른 곳에 투자하기도 하므로 완전히 불가능성으로 결론짓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본고에서는 이를 가능성으로 두고자 한다. 향후 애도의 불가능성보다 가능성에 주안점을 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기를 고대한다.

<참고문헌>

 

 

1. 기본 자료

 

권여선, 『레몬』, 창비, 2019.

김애란, 「입동」,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임 현, 「무언가의 끝」, 『그 개와 같은 말』, 현대문학, 2017.

 

2. 단행본

 

베레나 카스트, 채기화 역, 『애도』, 궁리, 2007.

왕은철, 『애도예찬-문학에 나타난 그리움의 방식들』, 현대문학, 2012.

왕은철, 『트라우마와 문학, 그 침묵의 소리들』, 현대문학, 2017.

 

3. 학위 논문 및 평론

 

3.1. 학위 논문

김정선, 「권여선 소설에 나타난 애도 실패의 미학」, 고려대학교 석사논문, 2018.

박선경, 「세월호 관련 소설에서 나타난 사회적 트라우마 형상화에 관한 연구」, 성공회대학교 석사논문, 2017.

한석현, 「애도와 실재의 윤리: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와 밝은 방』」,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12.

 

3.2. 평론

왕 철,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이론-“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영어영문학』, 58(4), 2012.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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