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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불
강연호 | 승인 2012.05.23 |(0호)

물불
                                                                                               이영광

1억 5천만km를 날아온 불도 엄연한 불인데
햇빛은 강물에 닿아도 꺼지질 않네
물의 속살에 젖자 활활 더 잘 타네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한 버드나무 그늘에 기대어
나는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는데
그 사랑을 다음 생까지 운구(運柩)할 길 찾고 있는데
빨간 알몸을 내놓고
아이들은 한나절 물속에서 마음껏 불타네
누구도 갑자기 사라지지 않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저렇게 미치는 것이 좋겠지
저 물결 다 놓아 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水量),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 말릴 수 없는 한 몸이라면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 하랴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빠져 죽든 타서 죽든
물불을 가려 무엇 하랴


우리말 관용구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지요. 이 관용적 표현들에서 ‘물불’은 말 그대로는 ‘물과 불’의 합성어인데요, 흔히 어려움이나 위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결국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어려움이나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때로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무모하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는 표현입니다.
물과 불은 원래 상극이지요. 하지만 강물에 닿은 햇빛은 꺼지지 않고 찬란하게 반짝거립니다. 태양빛이 지구에 와 닿으려면 1억 5천만 km를 날아와야 하는데, 그 “엄연한 불”인 햇빛은 강물에 닿아도 꺼지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반짝거려 “물의 속살에 젖자 활활 더 잘타네”라고 감탄하게 합니다. 이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물과 불의 상상력입니다. 물가의 버드나무 역시 한편으로는 수분을 빨아들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햇빛을 받아 잘 자라겠지요. 그러니까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한 버드나무입니다.
그 그늘 속에서 화자는, 마음껏 물놀이하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합니다. 사랑을 침울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네요. 그러니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입니다. 말하자면 뜨뜻미지근했던 사랑의 기억을 돌이키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사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언제나 다음 생까지도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아쉽고 심각한 법이지요. 햇빛에 반짝거리는 물속에서, 그야말로 마음껏 불타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아이들이 빨간 알몸이, 화자는 새삼스럽습니다. 그렇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미치는 것이 부럽습니다. 왜냐구요. 자신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껏 불타지도 못했으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지도 못했으며, 미치지도 못했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로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스스로를 던지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한없이 흘러가면서도 물결의 수량이 여전하다면, 그리고 그 물결에 반짝거리는 찬란이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그 사랑에 “빠져 죽든 타서 죽든” 과연 물불을 가려 무엇하겠습니까.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 말릴 수 없는 한 몸이 되려면 이처럼 어떤 계산도 두려움도 머뭇거림도 없이 달려들어야 하나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에 늘 목말라 하면서도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스스로 몸을 사려 물불을 가리곤 하지요. 물불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가리지 않아야 했다는 것, 이 작품에 은연중 배어나는 비애의 정서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못 이룬 사랑의 기억이 아쉽고 서글픈 회한으로 남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요.
 

강연호  (시인·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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